세계최고 금속활자(?)‘증도가자’진위논쟁...무엇이 문제인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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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과수의 서체분석 결과 등을 (문화재)심의위원조차 질책…왜 이런 일이?
고려시대, 위조글씨도 아니고 유사도 90%이상…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2010년 9월1일 서지학자인 남권희 교수로부터 시작된 고려시대 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 진위논쟁은 지난 10여 년 간 고미술·문화재계의 최대이슈였다. 논쟁·검증·재검증 끝에 2017년 4월 13일 문화재청(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에서 고려금속활자('증도가자') 101점의 보물 지정 안건을 심의·부결하였으나, 남권희 교수 등 ‘증도가자기초학술조사연구팀’ 등의 강력한 반발과 국회학술심포지엄 등으로 재점화되어 국민적 관심을 증폭시켜가고 있다. 이에 본지는 관계 자료를 중심으로 증도가자 진위논쟁의 내막과 실체 등을 분석·게재한다.
금속활자 제작 및 증도가 중조(번각본) 시대의 활자상황 연구가 우선적 상황
본건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 논쟁은 2010년 9월 1일 서지학자인 남권희 교수가 다보성갤러리(회장 김종춘) 소장, 금속활자 100여 점을 분석한 결과 이 중 12점이 고려 고종 26년(1239) 목판본으로 복각(카피)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보물 758호)의 글자체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남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명(明) · 소(所) · 어(於) · 보(菩) · 선(善) · 평(平) · 방(方) · 법(法) · 아(我) · 복(福) · 불(不) · 자(子) 등 12자를 목판본 '증도가'에서 찾아보면 같은 모양이 관찰된다면서, 이번에 발견된 활자들을 ‘증도가자’로 부를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자료2)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1239년 간행된 목판본 증도가에 붙은 당시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 최이(崔怡)의 발문에 의하면 그 이전에 고려에서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간행한 증도가가 있었지만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아 최이 자신이 각공(刻工)들에게 이를 목판본으로 복각케 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국내 서지학계에선 1239년 목판본 증도가가 나오기 전 이미 금속활자본 증도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보성 소장 금속활자가 증도가를 찍은 활자라면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 발견으로서 세계 활자(인쇄)역사를 다시 쓰게 되는 세계사적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위규명 등에 초미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 발견은 세계 활자역사를 바꾸는 세계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진위규명과 함께 금속활자 제작 기원(시기) 및 증도가 중조(번각본) 시대의 활자 (제작)상황 연구가 우선적 상황이다. 다행스럽게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복원을 위한 기초 조사 연구(2003. 청주시), 고려금속활자 조사 연구(2011. 청주고인쇄박물관), 한국 금속활자 발달사(2018. 경북대학교출판부), 고려-조선 금속활자 판본(2020. 문화재청) 등 수십 권의 저서와 수백편의 논문 등이 발간, 발표되어 있는 상황이다.
우선 금속활자 기원설에 대해 살펴보면 증도가의 주자(활자)인쇄를 근거로 1232년(강화천도) 이전설이 통설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가운데, 중앙박물관 소장 ‘복’활자의 성분이 해동통보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해동통보가 주조된 숙종 7년(1102년)부터 금속활자가 제작되었을 것이란 설도 일정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어쨌든 1232년 천도이전 상당수 금속활자가 제작(증도가 인쇄 등)되었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넉넉히 증명되어지는 상황이며, 더하여 고종 28(1241)년에 간행된 동국이상국집에도 ‘상정고금예문(전50권)’을 금속활자로 발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1234년‘고종 21년’에서 1241년 사이에 최 이가 이 책을 기초로 금속활자로 28부를 찍어내어 여러 관청들에 나누어주었다는 기록 존재). 사실이 그렇다면 1239년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번각 전 이미 상정고금예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등을 찍어내기 위한 금속활자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증명된다.(전50권에 이르는 상정고금예문에 비춰보면 당시 이미 수 만자 이상의 금속활자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
이런 객관적 사실(1230년대 수 만자 금속활자 제작)에 더 나아가 본건 금속활자가 증도가 활자(인쇄)본에 사용된 활자가 맞는지와, 이 활자가 증도가 번각본의 글자와 일치(유사도 등)하는 지에 대한 점검(연구) 등이 서체(비교)분야의 핵심 사안이다. 나아가 동국이상국집의 글자와 유사도 비교도 필수사항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 활자본의 총 글자수는 9,344자이며, 번각본은 최이의 발문 74자가 추가되어 있다. 활자본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활자와 직접비교는 불가한 상황이며, 활자본을 최이의 명으로 각수(刻手) 11명이 목판에 번각하였기 때문에 중조(번각)본과 활자와의 비교는 가능하다. (자료3)에서 보여 지는 바와 같이, 득(淂), 동백(東伯) 등 각수 11명이 동원되어 44면을 조각하였다. 이중 東伯, 一明, 吳準, 唐甫, 公大, 珍才는 1236〜1951년의 제조대장경 각수로도 활약했고, 東伯, 一明, 公大, 珍才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번각이 이루어지던 1239년도에도 대장경 각수로 참여하고 있었음이 기록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고려는 대몽항쟁기간(1232〜1270. 강화천도)에도 활발하게 각종불경을 찍어낸다. 이로 인해 각종 활자 및 인쇄문화가 발달하였음은 물론이다.
다음으로 다보성갤러리 소장 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가 증도가 인쇄에 사용되었는지와, 더 나아가 동국이상국집에도 사용되었는지를 고찰하는 일이다(동국이상국집은 증도가 번각본 발간 2년 후인 1941년 발간되었다). 증도가의 활자본은 없기에 번각본과의 서체 유사도 및 중첩도 비교 등이 우선이며, 동국이상국집과 서체 비교 등도 이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발간에 사용된 총 글자 수는 1회사용 628종, 2회 이상 사용 966종 8,717자 등 1,594종 9,344자이다(번각본 발문 74자 제외). 다보성 갤러리 소장 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 101 점 중 증도가자 계통은 59자이며, 권(眷) 등 8자는 증도가 인쇄에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어 있고(이중 일부는 동국이상국집 제작에 사용된 것으로 조사되어 있음), 심(心) 등 6자가 2〜3번 중복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가장 많이 사용된 글자는 不(248), 無(198), 來(101), 一(99), 仁(90) 등의 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다보성 소장 증도가자 계통으로 분류된 59점 중 증도가 번각에 사용되지 않는 활자 및 2〜3개 중복 제작된 동일자(중복사용)를 제외한 37자가 사용되었으며, 사용회수는 대조결과 1,352번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더하여 동국이상국집에도 다보성 소장활자와 비슷한 서체가 2,000여점에 이른다고 조사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정도면 증도가 등을 찍어낸 활자라고 분석할 수 있다.
활자와 번각본 서체와의 유사도 분석 등을 함에 있어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1) 시대상황이 위조활자를 논할 상황이 전혀 아니므로(과학적 분석결과 위조 전혀 없음)연구의 자세로 모든 글자(증도가 9,344자)와 꼼꼼히 대비해야 한다는 점과, 2) 활자본과 번각본의 미묘한 차이들을 감안하여 각수들의 사체 등을 꼼꼼히 분석하면서 유사도, 중첩도 등을 실증적으로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다.
서체 비교분석과 관련하여 2011년 발간된 고려금속활자연구(청주고인쇄박물관)등 수 십 종의 서적과 100여 편의 논문들이 발간·발표되어 있으며, 저서 및 논문들의 대체적 경향은 다보성 소장 금속활자와 남명천화상승증도가 번각본의 서체는 유사하다고 설시하고 있다. (자료4)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활자 ‘光’과 증도가 및 동국이상국집에 나타나는 서체는 각수들의 개성(특성) 및 활자와 번각본의 차이점 등을 고려하면 유사성 등이 충분히 인정되는 상황이다.
활자(서체)의 유사성 등과 관련, 금속활자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지정조사단 의 곽노봉, 배현숙 등 서체비교 분야 검증위원조차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과수의 서체분석 결과 등을 (문화재)심의위원조차 질책…왜 이런 일이?
고려시대, 위조글씨도 아니고 유사도 90%이상…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서체분야 비교분석과 관련하여 2003년 증도가 기초조사 연구를 시작으로 남권희 교수에 의해 증도가가 알려진 2010년부터 본격적인 서체 연구 등이 시작되어 1,000여 쪽에 이르는 서체분석 자료(저서, 논문)들이 발간·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2014년 6월 남권희 교수가 이끄는 경북대 산학협력단이 증도가자 학술조사 연구팀으로 선정되어 남권희, 김성수 교수 등 33명의 학자들이 총괄연구원으로 참여하여 서체비교 등, 분야별(이론·판본/과학분석/주조 및 조판 등)연구 과제를 실행, 같은 해 11월 30일 “...조사된 109점(문화재지정신청 101점 포함)의 활자는 고려시대에 주조되고 일부 사용되었던 활자임이 확인되었다(종합의견서 제7항)”는 취지의 661쪽에 이르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남권희 교수가 처음부터 진품으로 주장했기 때문에 보고서 (진품)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2015년 2월 기초학술조사를 (재)검증하기 위한 지정조사를 의결했고, 이에 같은 해 6월 서체비교, 연대측정, 제작기법 검증을 위한 지정조사단이 구성되었으며, 구체적 검증을 위해 과학조사 부분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서체 비교 분석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주조·조판 검증 등은 지정조사단에서 수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서체 (비교)분석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에 맡겨졌으며, 국과수 디지털분석과는 2016년 1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서체비교 용역(연구)을 시행하여 2016년 12월 26일 <‘고려금속활자’ 서체비교 연구결과 보고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했다.
국과수의 서체 분석 결과는 문화재청의 (부결)결과 발표문에 나타난 바와 같은, “신청활자와 신청활자로 찍었다는 주자본을 번각한 증도가 서책의 글자와의 유사도 분석에서, 글자의 모양, 각도, 획의 굵기 등에서 대조집단인 임진자 활자 복각본에 비해 평균 유사도는 낮고, 유사도 편차의 범위가 큰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일관된 경향성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다만, 증도가 서책의 동일 글자일지라도 번각 과정에서의 변수를 고려할 때 활자-글자의 유사도 분석 결과만으로 신청 활자가 증도가를 찍는 데 사용된 활자인지 단정하기 어려웠다”는 취지(정도)였다.
국과수는 번각본 ‘증도가’ 3종의 선인출본 분석 결과 서울본(삼성출판박물관본)을 선정했으며, 서체 유사도 분석을 위해 ①1:1 중첩비교를 통한 중첩율 비교 방법, ②윤곽선 분포기반 수학적 계산(SHAPE CONTEXT MATCHING) ③기계학습(DEEP LEARNING) 기반 유사도 비교를 진행했으며, 분석결과 증도가 활자와 서체는 대조군(임진자) 서체에 비해 유사도가 낮으며, 상이한 집단으로 나타난다고 보고했다(연구결과 및 결론 제Ⅳ항). 즉 서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과수의 서체분석결과에 대해 기초학술조사팀 및 비판론자들은 “1932년 이전 제작된 활자를 이후 500년이나 지난 임진자 및 인쇄(번각)본과 비교하다니 어이가 없다. 금속활자 기술이 훨씬 발달한 18세기의 상태가 좋은 활자 및 인쇄본과 금속활자 초기의 증도가자를 비교하는 건 무리…”라면서 격렬히 반발했다. 김성수 당시 한국서지학회장은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데이터를 산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완우 한국학중앙연구소 교수는 개별 활자의 유사도 측정 결과를 보면 임진자의 평균치(0.952)보다 높은 글자가 11자, 1434년의 초주갑인자(0.933)보다 높은 글자는 28자나 된다”며 “오히려 초주갑인자의 서체 유사도와 거의 가까운 것은 매우 높은 유사도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0.03이 유의미한 차이라고 할 수 있는지 지극히 의문스럽고, 딥러닝 방법으로 비교한 결과 유사도 차이는 5% 미만이었다. ‘무엇이 유의미한 수준이란 말인가?’라면서 질타했다.
뿐만 아니라, 기초학술조사팀 및 비판론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주자본과 번각본 비교시 ‘증도가자’로 찍었다고 추정되는 ‘동국이상국집’의 비교는 필수적이었음에도 제외하였고, 최상의 인본을 선정, 비교하여 수치화한 점, 목판 번각본이 갖는 일반적인 특징(번각본의 재번각, 번각본 초쇄와 후쇄 등) 등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나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단순하게 결과에 나타난 수치로 잘못 해석한 것에 동의할 수 없다”, “활자본과 번각본의 차이는 이미 많은 유물과 전문가들에 의해 그 차이가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활자본과 번각본을 동일시해서 서체분석을 진행한 것 자체가 상식을 넘어선 접근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특히,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15년 증도가자의 이중구조를 이유로 가짜임을 주장하여 세간에 충격파를 던졌으나, 조사결과 문제 없는 것으로 드러나 이미 신뢰를 상실했다. 가짜몰이로 오인될 정도로 문제를 일으킨 국과수에 서체분석을 맡긴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국과수는 이건 감정에 있어서만큼은 제척대상 아닌가?”라면서, 국과수의 서체분석 결과에 대해 격렬히 성토했고, 이런 성토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국과수의 서체분석 결과 등에 대해 심의위원조차 질타하기도 했다. (위원) “…저는 증거판단의 전문가로서 이게 그 활자를 가지고 찍은 글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번각본을 가지고 비교하다 보면 똑같을 수도 없고 똑같을 가능성도 없고 해서 가능성이 80~90% 된다면 번각본으로서 충분한 것이지 그 서체비교의 비율이 과학적 판단을 뒤집을 또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속기록 31p)” (위원) “…지금 고려시대의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냐, 아니냐하는 것으로 처음 시도해볼 때의 기술이 임진자 때와 비슷하리라고는 생각하면 더군다나 말이 안 되고요.(속기록 34p)”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자료5)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남명상송증도가 (번각본)서체는 굵기, 길이, 방향, 모양이 다른 등 제 각각으로, 서로 완전히 일치하는 글자는 없는 상황이다. 이는 여러 각수가 동원되어 조각하는 바람에 각수에 따른 서체, 행간, 자간, 획의 굵기 차이 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또한 같은 각수가 새긴 같은 글씨라도 극히 미세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전체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증도가를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활자(1232년 이전 제작) 및 번각본과 1446년 간행된 석보상절(주초갑인자) 및 1778년 간행된 속명의록(임진자)의 주자본, 복각본, 활자(석보상절은 활자 없음)등과 유사도 등을 단순 비교하여 신청활자와 번각본(증도가)의 서체가 다르다는 식으로 판단을 한다는 것은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솔직히 200년, 500년도 더 지난 정교한 활자와 이건 신청활자를 비교·분석한 것 자체가 상식적이냐에 의문표를 던지게 하면서, 결과에 대한 동의(同意)가 어려운 상황이다.
기초학술조사단 및 비판론자들은 “국과수가 왜 복잡하게 만들어 도리어 혼란을 초래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안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누가 보아도 우선 대조군이 잘못되었고, 먹이 잘 묻어나오지도 않는 3D프린트 활자로 실험했고, 번각본의 차이(수축)조차 무시했다. 더하여 수많은 활자들의 주자본과 번각본을 대조하여 평균치를 추출한 것이 아니라, 최상의 인본(임진자)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이것과 다르다는 식으로 발표했다. 엉터리 실험, 목적성 실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위조활자가 나올 상황이 아니었기에 우선 육안으로 식별하여 거의 유사하면 증도가를 찍은 활자가 맞는 것이다. 이것이 상식 아닌가? 국과수의 의도가 의아할 뿐이다”면서 비판하고 있는 상황이다.
신청활자가 제작된 1230년대는 위조활자 제작은 상상할 수 없고, 또한 각종 과학감정결과 위조 흔적 등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①중첩율 비교 ②윤곽선 분포기반 수학적 계산, ③기계학습(DEEP LEARNING) 기반 유사도 비교에 앞서 증도가로 분류된 활자 52점(제외 및 중첩활자 포함)과 9,344자에 이르는 증도가 전체 글씨와의 전면 서체비교 및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가 사용되었다고 추정되는 동국이상국집과의 서체비교 등이 우선적 상황이다.
(자료6)의 각종 자료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신청활자와 증도가 및 동국이상국집과의 서체비교 이미지 등은 1000여 쪽에 이르고 있으며, 증도가자로 분류된 59개의 활자이미지 모두 3D 스캔되어 있다. 이들 활자와 증도가(9,344자) 및 동국이상국집에 있는 글자와의 유사도 및 중첩도 등을 세밀히 비교·분석하면 진실은 밝혀질 것으로 보여 진다. (재)분석에는 파동을 일으킨 국과수가 배제됨이 마땅하다. 왜 문화재심의위원조차 국과수의 서체분석을 질책하였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목각(번각)본의 차이 등을 고려하면 90%이상 유사(중첩)하다면 인정함이 마땅하다. 고려시대이고, 위조글씨도 아니고 유사도 90%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진실규명의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계속)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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