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고 금속활자(?)‘증도가자’진위논쟁...무엇이 문제인가 (11) > 증도가자 진실 규명

본문 바로가기

증도가자 진실 규명

세계최고 금속활자(?)‘증도가자’진위논쟁...무엇이 문제인가 (11)

페이지 정보

  • 조회수4,113
  • 작성일21-04-15 10:35

본문

소장자에 따라 문화재의 가치 및 진위 등이 뒤바뀔 수도 있단 말인가

출처대신 서체(전부)확인 및 주조·조판 (재)검증을 통해 진실 규명해야  

 

2010년 9월1일 서지학자인 남권희 교수로부터 시작된 고려시대 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 진위논쟁은 지난 10여 년 간 고미술·문화재계의 최대이슈였다. 논쟁·검증·재검증 끝에 2017년 4월 13일 문화재청(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에서 고려금속활자('증도가자') 101점의 보물 지정 안건을 심의·부결하였으나, 남권희 교수 등 ‘증도가자기초학술조사연구팀’ 등의 (강력)반발과 국회학술심포지엄 등으로 (재)점화되어 국민적 관심을 증폭시켜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본지는 관계 자료를 중심으로 증도가자 진위논쟁의 내막(실체) 등을 분석·게재한다. 

 

▲ (자료1) 증도가자 빌 총(穴+童)字 (사진제공=다보성고미술)   © 박명섭 기자


금속활자(일명‘증도가자’)구입에서 (문화재)지정신청·부결까지 격정토로

  

세계최고 금속활자(?) ‘증도가자’ 진위논쟁...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10편(3.24)기사를 통해 2017년 4월 13일 문화재청의 증도가자 보물지정 신청에 대한 검토 결과 (부결)발표문에서 조판실험 결과 조판불가능은 잘못된 전제(주자본=번각본)에서 출발된 부정확(잘못)한 결론일 뿐이라면서, 주자본과 번각(목판)본은 통상 5〜8% 차이(번각본 수축)을 보이며, 이는 각종 문헌 등으로 입증된 공지의 사실의 사실임을 지적했다. 더하여 신간류편역거삼장문선고부, 증간교정왕상원집, 신증동국여지승람, 역학계몽요해, 주자어류, 삼락직해 등등 수많은 문헌들을 사례로 주자본과 번각본의 광곽 차이(0.8〜2.9cm)를 제시했다. 즉, 공지의 사실인 수축률조차 고려하지 않는 (조판)실험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 주자본과 번각본의 수축률 비교자료(0.7 〜2.8cm 번각본 수축)


조판실험의 결과는 부결 결정의 심대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증도가 번각본 44장의 (세로)광곽크기는 17.2〜18.6cm로 제각각이고, 각장 활자크기 모두 또한 제 각각이며, 더하여 한 면 들어가는 글자도 존재하지 않는다(평균 220자 중 30〜40자 정도임). 그러므로 평균치로 계산한 조판실험은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가공 (논리)실험에 불과하다. 자료2)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을해자본과 번각본(1.5cm), 계축자본 권53과 번각본 권53(0.8cm), 병진자본 권16중과 번각본 권16중(2.8cm), 초주갑인자본 권3과 번각본(2.2cm), 초주갑인자본(대자 정축자)과 번각본(2.5cm), 정유자본과 번각본(0.7cm) 등 광곽 차이 등이 자료로 증명되는 것이다. 향후 문헌고증(수축률확인) 등을 통한 진실규명이 절실한 상황이다.

 

다음으로 출처 논쟁 등을 살펴보자.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진위 논쟁 및 심의·결정과정에서 부결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출처 및 소장경위다. 탄소연대측정, 각종 과학감정, 서체비교, 주조·조판실험 등을 통한 진위규명에 노력하기보다는 출처 및 소장경위 불명을 핑계로 부결결정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는 “...(중략)둘째, 신청활자의 중요성에 비추어 고려금속활자의 여부에 관해서도 검토한 결과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비롯한 과학적 분석에 의하면 고려 시대에 제작된 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출처와 소장경위가 불분명하고 금속활자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청동수반‧초두와의 비교조사가 불가능하여 고려금속활자로 판단하기도 어렵다”는 발표문에서 여실히 읽혀진다.

  

2010년 9월 1일 서지학자인 남권희 교수에 의해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가 세상에 알려지고, 더하여 실질 소장자가 당시 고미술협회장이었던 다보성갤러리(회장 김종춘)로 알려짐에 따라 더욱 세간의 뜨거운 주목을 받게 됐다. 통상 문화재(국보·보물) 지정 신청 후 1년 내외의 기간에 결말이 나는 것과는 달리 이건은 세상에 알려진 후 7년, 지정신청 후 6년이 지나서야 (부결)결정이 난 이유도 다보성 갤러리 소유였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이 과정에서 국과수의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7점의 금속활자가 가짜라는 취지의 발표까지 더해져 수사가 착수되었고, 이런 연유 등으로 더욱 엄격하게 조사(검증)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가 세상에 알려진 후 부결결정까지 7년 동안 출처 및 소장 경위 등이 시비의 대상이 되었으며, 결국 소장경위 등을 앞세워 부결시켰다.

 

문화재 지정심의를 함에 있어 출처 및 소장경위 등을 확인함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관련자들은 또한 이에 최대한 협조하여야 함은 당연하다. 이에 관계당국은 관련자(구키야 마코토, 박진규, 김병구, 이준영 등)들에게 사실 확인 증명서를 징구함은 물론 매매과정 등을 일일이 확인했다. 이런 과정에서 구키야 마코토에게 1995년 3〜4월경 금속활자를 판매한 최초 소장자였던 다다(당시 70대 후반)는 2000년대 사망하였기에 더 이상의 확인은 불가능한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후의 구키야 마코토→박진규→김환제(작고)→김병구→이준영→이정애(김종춘의 처)로의 소유권 이전경로는 순리적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보여 진다. 반면, 원 출처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며, 고려궁터인 개경 만월대에서 불상 경 출토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95년 다시 한국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어질 뿐이다.

 

▲ 다보성갤러리 김종춘 대표  © 박명섭 기자


박진규의 구입으로 한국으로 건너 온 뒤 이정애(김종춘 대표의 처)가 취득한 경위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95년 박진규→김환제(작고)→김병구의 이전 경로를 통해 소장되던 금속활자에 대해 김종춘 고미술협회장은 2010년 3〜4월경  고미술업계 관계자들을 통해 금속활자 소문을 듣고 접촉을 시작했다고 한다. 

 

다보성갤러리 김종춘 회장의 전언에 따르면, “2010년 3〜4월 대구지역 고미술 업계 관련자로부터 금속활자 정보를 취득한 후, 서지학자 남권희 교수를 수소문하여 진위를 문의하였더니 ‘5〜6년 연구한 결과 고려금속활자가 틀림없다’고 이야기를 하여, 2010년 5월 중·하순경 대구 문화재업계 인사의 소개로 소장자인 김병구 박사를 만나 양도를 요청했다. 그러나 김병구 박사는 양도를 거절했다. 해서 김병구 박사에게 ‘판매의향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달라’고 하면서 명함을 주고 헤어졌다. 이때까지는 남권희 교수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이후 몇 달 후인 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8월 15일로 기억) 김병구 박사가 전화 (약간 취기가 있는 목소리 인 듯함)하여 활자를 구입할 의향이 있느냐고 문의하여 있다고 대답하면서, 곧바로 처남 이준영과 함께 대구로 내려가 활자를 구입한 것이다. 이후 남권희 교수를 만나 활자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고, 그해 9월 1일 남권희 교수의 발표 및 전시가 개최된 것이다. 이후 그해 12월 2일 KBS 역사스페셜 ‘세계최고 금속활자? 증도가자의 진실은’이란 특집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2011년 국회에서까지 보호조치를 거론하자 문화재청 엄모 정책국장이 3번이나 저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문화재 지정신청을 요청하여 2011년 10월 지정신청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로부터 6년 이상 검증·재검증의 지루한 과정을 거치다 탄소연대측정 및 각종 과학감정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소장 경위 등을 핑계로 부결했다.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지정신청 이후(2011. 20)인 2013년 7월경 일시 공개된 청동수반‧초두를 구입하려다가 여력도 만만치 않았고, 소장자가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기 원치 않아 돌려주었다. 특히, 청동수반 및 초두는 문화재 (지정)신청 유물도 아니다. 그럼에도 문화재청은 ”... 청동수반‧초두와의 비교조사가 불가능하여 고려금속활자로 판단하기도 어렵다“고 발표했다. 문화재신청을 한 유물은 금속활자 101점이다. 문화재 신청도 아니고 더욱이 본인 소장 유물도 아닌 수반과 초두를 연결시켜 부결시키는 논리는 정말 납득하기 어렵다. 101점 활자 전부에 대해 파괴검사까지 동의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활자 5점까지 훼손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비협조 하였단 말인가? 그럼에도 문화재청은 비협조 등을 이유로 부결을 결정했다. 유물의 상태를 연구·검증하여 판단하는 것이지, 사람 따라 왔다 갔다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 인가?”면서 격렬한 소회를 토로했다.

 

소장자에 따라 문화재의 가치 및 진위 등이 뒤바뀔 수도 있단 말인가

출처대신 서체(전부)확인 및 주조·조판 (재)검증을 통해 진실 규명해야   

 

김종춘 대표의 위 격정 토로와는 별개로 본건 금속활자 진위논쟁 국면에서 모든 것을 출처 및 소장경위에 매달리면서 소장자의 비협조 등을 핑계로 부결 처분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자료3)의 속기록에서 보여 지는 바와 같이,  “...안타깝게도 과학적 분석으로 보아서 진품일 가능성이 많은데 신청자가 스스로 소장경위에 신뢰성을 떨어트리고 청동용기를 조사하는데도 협조를 하지 않고 있고...”가 부결의 핵심요지인 것이다. 심의위원들의 식견 없음의 자탄 속에 언론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소장자에게 책임을 미룬 희한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 소장자(김종춘)에게 책임을 미루는 속기록(2017. 4. 13)


본건 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2010. 9. 1) 출처 및 소장 경위 등이 줄 곳 초점이 되어 왔음은 사실이다. 문화재지정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는 P모씨의 “상인의 물건을 지정해 주어 값이 뛰면 누가 책임지느냐?”의 취지의 발언을 비롯하여, “문화재 지정을 해주면 문화재청장을 법정에 세우겠다”는 녹취록 등등, 진실규명과는 거리가 먼 이전투구(泥田鬪狗)와 세력다툼 양상으로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즉, 상인(김종춘 대표)의 소장품이기 때문에 어떻게는 부결을 위해 안간힘을 다한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속기록 전반을 통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드러난 증거(녹취록, 속기록, 언론기사 등)들을 통해 확인되어지는 상황이 이러하다면 신청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는 진위와는 관계없이 처음부터 부결이 예고되어진 각본처럼 읽혀진다. 왕궁(만월대) 현장 발굴 유물이 아닌 한 아득한 저 옛날인 1230년대의 활자 제작상황과 이후의 출토 상황을 누가 어떻게 알 수 있겠으며, 더하여 최초 소장자인 ‘다다’마저 2000년대 사망한 것 아닌가? 이후의 구키야 마코토→박진규→김환제(작고)→김병구→이준영→이정애(김종춘의 처)로 이어지는 소유권 이전 경로는 지극히 순리적이며, 정상적인 것이 아닌가? 더하여 관계당국은 관계자들에게 수차 확인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관계당국은 소장자(김종춘 대표)에게 증명 불가능한 원천증명(출토 등)을 요구하면서, 합당치 않는 비협조 등을 내세워 지정부결 한 의도(목적)등에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다. 현 소장자가 먼 옛날의 출토와 이미 사망한 다다 이전의 소장경위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솔직히 불능상황 아닌가?

 

“방사성탄소연대 고려시대 및 각종 과학감정결과 특이점(위조흔적) 없음” 등, 절대적 증명력 등으로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로 인정되어 문화국위를 세계적으로 떨칠 수 있는 결정적 사안임에도 현 소장자로선 더 이상 증명 불가능한 원천증명과 납득할 수 없는 비협조 등을 내세운 부결결정은 문화 흑역사로 기록되어지지 않을까 실로 우려스런 상황이다. 특히, 2015년 10월 국과수의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활자 7점은 위조라는 취지로 발표하여 크나큰 충격을 준 상황에서 이후의 각종 과학감정에서 어떻게든 위조흔적들을 찾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을 것 아닌가? 그러므로 흔적들이 있었다면 반드시 밝혀졌을 것은 자명한 것 아닌가? 그러나 결과는 ‘특이점 없음’ 이었다.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의 진위논쟁은 서체분석에서 출발했다. 서체는 활자와 번각본의 차이점 등을 고려한다면 상식적인 측면에서 누가 보아도 같은 글씨임이 인정되는 상황이다. 이는 KBS 역사스페셜의 중첩 화면 등을 살펴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이다. 그 시대에 무슨 위조활자를 제작한단 말인가? 2016년 12월 국과수는 신청활자 번각본보다 500년이나 이후 제작된 임진자 복간본과 대조하여 유사도가 낮고 편차가 크다고 발표했으나, 기초학술조사팀 및 비판론자들로부터 “국과수는 가짜파동의 해프닝을 일으킨 당사자이기 때문에 감정(분석)자격조차 없다”면서 도리어 질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관계당국이 주도한 주조 및 조판실험의 결과 등도 비판받기는 마찬가지다. 문화재청은 신청활자가 밀랍주조법으로 제작되었다고 판단했으나, 실물활자에서 보이는 연마흔적이나 분할선 등은 전형적인 주물사 주조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로서 밀랍주조기법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특징들인 것이다. 더하여 수많은 각종 문헌자료 등에서 확인되어지는 주자본에 비해 (목판)번각본이 5〜8%정도 수축되어진다는 공지의 사실마저 무시하고 ‘주자본=번각본’이란 잘못된 전제를 근거해 진행한 조판실험은 실체적 진실이 아닌 가공실험에 불과한 것이다. 주자본과 (목판)번각본의 5〜8%정도 차이는 수많은 자료들로 증명된다.

 

이렇듯 논란 많은 각종 쟁점(탄소연대측정, 과학감정, 서체비교, 주조·조판 실험 등)을 넘어 부결결정의 원천에는 ‘출처 및 소장경위 불분명’이 자리 잡고 있다. 속기록 60페이지의 “(위원)...소장경위는 설명하면 할수록 점점 꼬여서 영원히 그것은 해줄 수가 없죠”가 이의 증명이다. 즉, 상인(김종춘 대표)의 소장품이어서 영원히 문화재로 지정해 줄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장자에 따라 문화재 가치 및 진위 등이 뒤바뀔 수도 있단 말이 아닌가?

 

▲ 정 모씨 양심선언 인중서 중 일부(2015. 12. 07. 작성, 인증)


이건 진위 논쟁의 진정한 미스터리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010년 9월 1일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가 세상에 알려진 직후인 같은 해 10월 5일 MBC PD수첩(사라진 고구려벽화, 방송 그 후)은 ‘증도가자’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중원대 이상주 교수와의 인터뷰를 보도하며 활자의 유통 경로 및 탄소연대측정을 요구하고 나섰으며, 역시 같은 달 20일 KBS '추적60분'도 '세계 최고(最古)? 수상한 금속활자' 방송을 통해 중국 내 가짜 청동제품 생산 현장을 취재했다며, 금속활자 연대까지 조작해 한국에 판매했다는 상인의 증언 등을  방영했다. 그러나 이 프로들은 2015년 12월 고미술업자 정 모의 양심선언 등을 통해 반대세력들의 김종춘 죽이기 공작임이 밝혀졌다(자료4. 인증서 일부).

 

이후 같은 해 12월 KBS 1TV 역사 스페셜 팀이 ‘세계 최고 금속활자의 진실은?’이란 방송 등을 통해 서체 중첩비교 및 슬플 비(悲), 부처 불(佛) 등 2점  먹의 AMS 탄소 연대측정 결과 고려시대(1160~1280년)로 나타나자 이후의 진행상황은 지루한 출처 논쟁 등으로 변환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문화재계 실력자의 ‘상인소장은 문화재 지정 할 수 없어..’ ‘지정시 문화재청장 법정에 서야(녹취록)..’라는 등등의 각종 음산한 기운이 돌다 결국 출처 및 소장경위를 내새워 부결결정을 발표했다. 결정적 진위규명의 근거를 찾지 못하자 언론비난 등을 피하기 위해 출처 및 소장경위를 내세워 부결을 결정한 것이다. 

 

▲ 다보성갤러리 김종춘 대표  © 박명섭 기자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의 문화재 지정부결 결정의 실질적 논거는 출처 및 소장경위 불분명이다. 그러나 기록에 편철된 취득경위 관련자료(구키야 마코토, 박진규, 김병구 등의 사실 확인 증명서 등) 등에는 허위 또는 가공 등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실질 소장자인 다보성갤러리 김종춘 대표로서는 출토상황이나 이미 사망한 ‘다다’이전의 소장경위 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사실 알지도 못하는 부분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고, 더하여 이를 빌미로 부결을 결정한다는 것은 더더욱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소명 등은 중요한 일임은 분명하나 전래유물들의 내력 등은 일일이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진위규명을 위해 탄소연대측정을 하고 각종 과학감정을 실시하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문화재청의 부결결정(2017.4.13.)은 관련자들(소장자 및 기초학술연구팀 등)의 반발을 넘어 국회로부터 검증특위 구성 등을 통한 재검증을 요청받는 등 새로운 국면에 봉착했다. 이대로 뭉갤 상황은 되지 못한다. 소장자에 따라 문화재 진위가 바뀔 순 없다. 더는 불가능 영역인 출처 소명에 매달리지 말고, 서체(전부)확인 및 주조·조판 (재)검증을 통해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계속)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