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20.12.07) 신라 왕녀 무덤에 돌절구•바둑돌은 있는데, 왜 금관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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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12-0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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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7일 경주 황오동 쪽샘 신라고분군 44호분 발굴현장에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팀의 환성이 터졌다. 2014년부터 조사해온 5세기께 무덤의 주검 자리(매장주체부)를 파고들어 간 지 이틀 만에 희귀한 유물인 돌절구를 발견한 것이다. 주검 자리를 살펴보니 머리맡에 껴묻거리(부장품)를 놓는 궤(상자)의 흔적이 드러났고, 그 안에 놓인 철 솥 옆에 토기 덩어리가 파묻혀 있었다. 수채화용 붓으로 흙을 털어내니 높이 11cm짜리 초소형 돌절구통과 내용물을 찧는 길이 14.4cm의 공이였다.
현재 약국서 쓰이는 막자사발 처럼 약제를 빻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이 돌절구는 생전 병환에 시달렸던 무덤주인의 사후를 위해 넣어준 듯했다. 심현철 연구원의 머릿속에 퍼뜩 기억이 스쳐 갔다. ‘돌절구 통과 공이가 한갖춤으로 된 유물은 40여년 전 신라 최대 왕릉 황남대총에서 출토됐던 게 유일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돌절구가 나온 44호분은 보통 무덤이 아닌데…’
예측대로였다. 돌절구가 출토된 다음 날에도 황남대총과 천마총 같은 신라의 왕릉급 고분 일부에서만 나오는 비단벌레 장식품이 튀어나왔다.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독창적인 물방울 디자인 안에 영롱한 금녹색 빛을 내는 비단벌레 날개가 수놓아진 사실이 처음 드러난 순간이다. 비단벌레 날개를 전면에 수 놓은 황남대총 출토 말안장 가리개는 고대 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품으로, 보존을 위해 글리세린 용액에 보관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주검 자리 발치 쪽 부장 공간에선 수 십여개의 자연석 바둑알이 무더기로 확인됐다. 4세기 중국서 전래한 바둑문화를 증거하는 바둑알 또한 흔치 않은 부장품이다. 돌절구와 비단벌레 장식, 바둑돌은 신라 고분에서 최고 상위의 왕릉급임을 입증하는 ‘3종 유물 세트’다. 3종 유물이 모두 나온 것은 1975년 발굴한 황남대총 남분과 이번에 조사한 44호분뿐이다. 조사단은 이 정도 유물이면 왕릉급이니 장신구로 금관이 나오지 않겠느냐고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후속 발굴해보니 무덤 주인은 금관 대신 ‘出’(출)자 모양의 세움 장식을 한 전형적인 신라 금동관을 썼다. 관에 이어진 금드리개 1쌍, 금귀걸이 1쌍, 가슴걸이 1식, 금·은 팔찌 12점, 금·은 반지 10점, 은 허리띠 장식 1점을 두른 것으로 밝혀졌다. 가슴걸이는 남색 유리 구슬과 달개가 달린 금구슬, 은구슬을 4줄로 엮어 곱은옥을 매달았다. 관은 금동제였지만, 딸린 장신구는 순금제가 상당 부분 섞여 있었다. 이런 형태는 황남대총, 천마총 등 최상위 계층 신라인 무덤에서만 확인된 구성과 디자인이다.
흥미로운 것은 무덤주인이 미성년자인 10대 여성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인골은 삭아 없어졌지만 장신구 출토품을 기준으로 한 피장자의 키는 약 150㎝ 전후의 어린 여성으로 추정됐다. 부장품 중 남성 피장자와 같이 묻히는 큰 칼이 없고 작은 은장도가 나온 데다, 금동관·귀걸이·팔찌 등의 장신구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최상위 계층이면서 왕이 아닌 어린 여성이라면 공주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장신구 크기가 작다는 점에서는 나이 어린 왕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인근 금령총과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금령총은 금관과 장신구 일체가 모두 순금제였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보면 44호분은 신라 왕녀, 그러니까 공주로 추정되는 무덤의 장신구와 부장품 매장 방식을 처음 드러낸 사례다. 특히 그동안 남성 피장자의 무덤에서만 나왔던 바둑돌이 어린 왕녀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은 신라의 바둑문화를 남녀 모두 즐겼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하지만, 풀어야 할 미스터리도 분명히 남는다. 왜 3종의 왕릉급 희귀 유물을 부장품으로 묻으면서 망자에게 금관을 씌우지 않았을까. 물론 왕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북분에서는 금관이 나온 사례가 있다. 그렇다면 당시 공주 같은 여성 차상위 왕족은 금령총에 묻힌 왕자와 달리 사후 금동관만 쓴 채 매장하는 장례규정이 있었던 것일까.
경주연구소는 7일 이런 내용의 조사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발굴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돌절구와 비단벌레 장식이 나온 주검 머리맡의 부장궤 유물층은 가장 위쪽 겉층만 걷어냈을 뿐이다. 심현철 연구원은 “비단벌레 물방울 장식물이 정확하게 어떤 마구나 기물에 붙은 것인지 아직 찾지 못했다. 부장궤의 유물층 아래를 파헤치면 우선 비단벌레 장식물이 훨씬 많이 나올 것이고, 전혀 보지 못한 미지의 유물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어린 왕녀 무덤으로 드러난 44호분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단서가 추가로 나올지도 관심거리다.
쪽샘 44호분 조사성과에 대한 온라인 현장설명회는 7일 오후 4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 중계된다. 일반인들도 참여해 발굴 내용에 대해 질의하고 답변도 들을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도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