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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저널21, 2021.05.26)세계최고 금속활자(?) ‘증도가자’ 진위논쟁...무엇이 문제인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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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21-05-2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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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증명력 배제는 법치원리 훼손…‘하늘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가공논리 

위작이 아니면 진품인 것이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2010년 9월1일 서지학자인 남권희 교수로부터 시작된 고려시대 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 진위논쟁은 지난 10여 년 간 고미술·문화재계의 최대이슈였다. 논쟁·검증·재검증 끝에 2017년 4월 13일 문화재청(문화재위원회 동산분과)에서 고려금속활자('증도가자') 101점의 보물 지정 안건을 심의·부결하였으나, 남권희 교수 등 ‘증도가자기초학술조사연구팀’ 등의 (강력)반발과 국회학술심포지엄 등으로 (재)점화되어 국민적 관심을 증폭시켜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본지는 관계 자료를 중심으로 증도가자 진위논쟁의 내막(실체) 등을 분석·게재한다. 

 

▲ (자료1) 증도가자 웃는 모양 진(單+辰)字 (사진제공=다보성고미술)   © 박명섭 기자


문자의 유래, 금속활자 발달사 및 신청활자의 특성 등과 동시대 상황

   

세계최고 금속활자(?) ‘증도가자’ 진위논쟁...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제18편(5.20)기사에서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가 발견되자마자 실물도 확인하지 않은 모 한문학자의 위조주장, MBC, KBS의 위작몰이 의혹(?) 특집방송 및 연이은 소장자에 대한 압수수색 및 대대적인 수사착수, 문화재계 실력자의 “상인 소장품 문화재 지정할 수 없어…” 란 해괴한 발언, 국과수발 모 언론의 황당한 위조 (단독)보도 및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의 신청활자에서 Tc검출 의혹제기 등, 모두들 가짜 만들기에 혈안이 된 것처럼 사안을 몰고 갔으며, 특히  절대적 증명력을 외면하고 가설을 앞세운다는 것은 상식의 붕괴임을 지적했다.

 

그날(2017.4.13.) ‘중국⋅북한 반응을 살펴야 한다.’는 희한한 의견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기초학술조사단의 반론기회조차 원천봉쇄 시키면서 강경파들 주도로 황급히 부결 처분했다. 문화재를 지정하는데 왜 북한, 중국의 눈치를 살펴야한다는 것인지 정말 참담한 상황이다. 어떻게든 부결로 몰아가려는 지정조사단 및 감정관련 기관들 의견만 청취할 것이 아니라, 기초학술조사단에게 반론기회를 제공해야함이 마땅함에도 원천 봉쇄시켰다. 막장드라마와 진배없다.

 

결국 하다하다 못해 “고려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있으나…문화재 가치 없다”란 기이한 모순논리를 개발해 낸 것이다. 이런 모순덩어리 논리를 과연 누가 이해할 것인가. 세계최고(?) 금속활자가 세력들의 암투로 화염에 휩싸인 것이다.

 

먼저 문자의 역사 및 금속활자 발달사를 살펴보면서 신청활자의 특성 등과 동시대 상황을 짚어본다. 과연 위조활자 가능성이 있는지의 측면에서 말이다.

 

인류의 4대 문명 발생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파키스탄과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 중국의 황허 유역에서 모두 고대 문자가 존재했다. 사물(事物)을 본 떠 사물이나 그것에 관련 있는 관념을 나타낸 문자로서, 이름 하여 상형문자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414년 건립된 1775자의 광개토대왕비와 561〜569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진흥왕 순수비(마운령비, 황초령비, 북한산비, 창녕순수비) 등을 통해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한자(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확인된다.

 

이렇듯 석문(각서)에서부터 필사, 인쇄 순으로 다양한 매체기록이 발전되어왔으며, 제지에 관한 기록은 영양왕 21(610)년이지만, 그 보다는 4세기 이전부터 종이가 기록매체로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먹과 붓도 제작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삼국시대 초기부터 다라니경의 사경 납탑 불사가 성행했다.  

 

현존 최고(最高)의 목판 인쇄본은 1966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국보 제126호. 자료2).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닥종이(한지)로서, 704~751년에 제작(추정)되었으며, 종이 원지의 크기는 폭6.7cm×길이 6.228m인데, 54cm 정도의 종이 12장을 이어서 약 6m로 만든 두루마리 종이로 전문이 (목판)인쇄된 것이다. 이것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인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보다 20년 이상 앞서는 것이다. 이 다라니경을 통해 당시에 이미 목판 (조판)인쇄 기술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금속활자는 11세기 송나라 필승(畢昇)이 교니(膠泥)활자를 만든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용화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445년경 쿠텐베르크의 42행 성서 제작을 위한 활자제작이 최고로 알려졌으나, 1972년1377년 청주흥덕사에 발간된 직지심체요절이 활자본임이 밝혀져 세계최고로 공인받았으며, 2010년 9월 1232년 이전 제작(추정)된 활자가 발견된 것 이다.

 

▲ (자료2) 무구정광대다라니경(세계최고 목판인쇄본. 국보 제126호) (사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발견된 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가 강화천도전인 1232년 전에 제작되었다면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흥덕사자보다 145년, 쿠텐베르크 활자보자 무려 213년이나 앞서는 것으로, 세계 금속활자(인쇄)의 역사를 갈아치우는 세계적 사건이다. 심층적 연구가 요구됨은 당연하다. 고려-조선 금속활자발달사를 짚어보자. 

 

우리나라 금속활자 제작의 기원에 대해 1)대각국사비명병서 기록을 토대로 문종시대(1047〜1083) 기원설, 2)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근거한 숙종 7년 설(1102. 최초의 동 화폐인 해동통보가 주조된 연도임), 3) ‘고금진보대전(상암고서박물관 구장본)’에 날인되어 있는 장서인을 토대로한 12세기 중엽 설, 4)‘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발문에 근거한 1232년 이전(강화천도)설 등이 제기되고 있으나, 1232년 이전 설이 통설(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어쨌든 해동통보가 주조된 1102년부터 금속활자 주조(제작)는 가능한 상황이었다.

 

더하여 고려금속활자를 증명할 기록과 실물 또한 존재한다. 증명자료들로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신인상정예문발미’ ‘동국이상국집’ 등이 있으며, 실물활자들로서는 지정 신청한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 101 점 및 국립중앙박물관의 ‘복’자, 북한개성역사박물관의 ‘전’자, 그리고 2015년 제7차 남북공동발굴조사단이 발굴한 ‘전’ 및 2016년 4월 북한이 단독 발굴한 4점 등이 남북한에 존재하고 있다. 북한은 현재도 고려금속활자 발굴을 지속하고 있음으로 만월대를 중심으로 향후 더 많은 고려금속활자 발굴이 예견되고 있다. 

  

당시의 (실제적)상황을 추정해 보면, 주자본을 (목판)번각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서책의 총 자수는 9,344자에 이르고 있으며, 더하여 1234〜1241년 사이   최이의 명으로 고금의 예의 자료를 두루 수집해 엮은 거질의 ‘상정예문’ 50권 28부를 금속활자로 찍어 관서에 내려 보냈다(최이를 대신한 이규보 발문). 상정예문을 찍어내기 위해서 수 만자 이상의 활자를 제작했을 것은 자명하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기(1234〜1241)는 강화천도 이후의 전란 상황이었다. 전란 중에 수많은 활자를 주조해 (주자)인쇄를 하였다는 사실은 천도(1232)이전에 이미 수많은 주자인쇄를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이의 집권기간(1219〜1249)에는 수선사, 금산사, 해인사, 백련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불전들이 간행되었고, 수천 명의 각수들을 동원, 1236〜1251년에 걸쳐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판각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주자·목판인쇄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수많은 금속활자가 제작됐을 것은 자명하다.  

 

이런 주자제작 및 인쇄기술은 발전을 더하여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활자(흥덕사자)을 개발하여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행했고, 같은 활자로 ‘자비도량참법집해’를 발간(번각본) 했다. 이런 기술은 조선으로 전승됐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금속 활자는 계미자, 경자자, 갑인자(初鑄), 병진자, 경오자, 을해자, 정축자, 무인자, 을유자, 갑진자, 계축자, 병자자, 경진자(再鑄갑인자), 경서자(을해자체경서자), 인력자(관상감활자), 무오자(三鑄갑인자), 무신자(四鑄갑인자), 병진왜언자, 낙동계자(현종실록자 초주·재주), 한구자(초주·재주·삼주), 교서관인서체자(전기·후기), 원종자(肅宗大字), 율곡전서자 또는 율곡인서체자, 임진자(五鑄갑인자), 정유자(六鑄갑인자), 정리자(초주·재주), 정리자체철활자, 전사자, 필서체 철활자, 신연활자제작 등으로 비약적 발전을 거듭한다. 더불어 각종 훈련도감자, 생생자 등등의 여러 목활자가 제작, 사용됐다. 

 

▲ (자료3) 한국 금속활자 발달사(1. 고려시대 538p. 2. 조선시대 477p. 남권희 저. 2018. 4. 경북대 출판부)  © 문화저널21 DB


살펴 본 바와 같이, 고려금속활자는 강화 천도(1232년)이전 최소 1,594종 9,344자가 제작(증도가)되었으며, 상정예문을 (인쇄)하기 위해 수 만자 이상이  제작됐다. 이는 사료로 증명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외 수많은 금속활자가 더 제작되어 불경, 사경의 인쇄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3세기 전반기에 간행된 수많은 불서(佛書)들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당시의 상황(수많은 금속활자 제작)이 이러한데 안타깝게도 그간 고려 금속활자는 많이 발견되지 못했고(신청활자 발견 이전의 고려활자는 중앙박물관 소장 ‘복’와 개성역사박물관 소장 ‘전’ 2자), 고려시대 활자본도 1972년 박병선 박사에 의해 ‘직지심체요절’이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주자(흥덕사자)로 인쇄한 것이 밝혀져, 세계최고활자본(고려시대 유일 주자본)으로 등극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 9월 1일 서지학자 남권희 교수에 의해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사실이라면 세계(활자)인쇄역사를 뒤바꾸는 세계적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진위 등을 둘러싼 논란 및 치열한 검증은 당연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과정들은 세력들이 개입하여 난장판 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60Page 심의속기록 및 문화재청장의 울부짖는 듯한 녹취록, 공작가담자의 양심선언인증서, 심의위원의 고백 녹취록(추후 공개예정) 등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제 세력들이 담합하여 증거 법칙상 진품 유력한 금속활자를 화염 속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 (자료4) 증도가자와 증도가 번각본(2011. 6. 발행. 123p)


절대적 증명력 배제는 법치원리 훼손…‘하늘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가공논리 

위작이 아니면 진품인 것…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고려시대는 동양에서 가장 방대한 초조대장경(1011〜1087) 및 육조대사법보단경(1207), 화엄론절요(1207) 등, 수많은 불서들이 간행(목판인쇄)되면서 인쇄문화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과정에서 금속활자가 제작(1232년 이전)되어, 증도가 및 상정예문 등을 찍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료로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그간 고려금속활자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복’자와 북한 개성역사박물관의 ‘전’자가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 9월 남권희 교수가 다보성갤러리 소장 고려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의 존재를 알렸다. 남 교수는 2002년부터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서책(번각본)의 9,344자를 수년에 걸쳐 분석한 결과 출현활자와 번각본의 글자가 같다고 판단하여 증도가자 출현을 알린 것이다. 그러나 세계최고 금속활자 출현이기에 논란 및 검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검증 과정 등은 치열하면서도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보면, 위조가능성부터 찾아 나서면서 전 방위 과학감정을 진행함은 당연한 코스다. 우선 위조가능성을 살펴보면, 출현활자 제작시기인 1220〜1230년대에 위조활자 제작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근대 또는 현대에 위조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예술품 위조는 1970년대 후반에 비로소 출현했다(이 모씨의 박수근 위작 등). 이런 일천한 위조역사를 차치하고서라도 예술품(문화재) 위조란 것은 먼저 진본이 전제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증도가자를 위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증도가 서책을 확보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국내 4권뿐인 증도가 서책이 위작범의 손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2000년 이후 단둥등지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중국 고문헌속의 활자들 위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진본(서책)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위조를 한다는 것은 소설에 불과할 뿐이다.

  

위조 가능성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탄소연대측정 및 각종 과학감정과 서체유사도 분석, 주조·조판실험 등은 치열하게 진행함은 당연하다. 사실 검증, (재)검증 등 6년에 걸쳐 4차에 걸친 탄소연대측정(25점), 20여 가지의 전 방위 과학감정, 1년에 걸친 서체분석(국과수), 주조·조판실험 등, 현대과학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은 다했다. 활자 5점을 훼손시켜가면서까지 말이다.

 

결론은 “탄소연대측정 및 과학감정의 결과 고려활자일 가능성은 있으나…문화재 가치 없다”였다. 절대적 증명력을 외면하고 가설 및 모순논리로 뒤범벅된 상식을 붕괴시킨 해괴한 결론이라는 점을 거듭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증명력(증거능력)과 관련하여 형사소송법 제315조는 당연히 증거능력이 있는 서류로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가족관계기록사항에 관한 증명서, 공정증서등본 기타 공무원 또는 외국공무원의 직무상 증명할 수 있는 사항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

2. 상업장부, 항해일지 기타 업무상 필요로 작성한 통상문서

3. 기타 특히 신용할 만한 정황에 의하여 작성된 문서

 

탄소연대측정 및 각종 과학감정은 위 법조 제2항, 제3항에 해당하는 절대적 증명력(증거능력)을 갖춘 문서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문화재청은 각종 가설과 추측 등을 앞세워 탄소연대측정 결과 등을 외면했다. 이런 가상 논리라면 ‘하늘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논리를 끌어들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특단의 반증(물증)이 없다면 절대적 증명력은 인정되어야 한다. 법치원리 훼손이다 

 

모든 논쟁에는 상호 토론과정이 필수적이다. 변론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그럼에도 관계당국은 수없이 요청한 기초학술조사연구팀의 끝장 토론을 외면하고 ‘북한, 중국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희한한 주장 속에 황급히 부결 처리한 것이 사실 아닌가. “신청활자가 위작이라는 증거는 못 찾았지만…이것이 진품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 분석에서는 이 정도의 입장으로 정리(속기록 17p)…”란 간사(유형문화재과장)의 발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작이 아니면 진품인 것이지 더 이상 무슨 무의미한 말이 필요한가.

 

결국 그 어떤 합당한 근거도 찾아내지 못하다보니 소장자를 핑계로 내세워  ‘가치 없다’면서 묻으려 한 것 아닌가. 1995년부터 김병구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2010년 김종춘이 구입한 것이 신청활자 출처(유전)의 전부인 것이다.

 

소장자인 다보성갤러리 김종춘 회장은 2017년 4월 13일 부결 후 같은 달 17일 프레스센터의 합동기자회견에서 문화재 마피아 척결을 요청했다. 2019년 J모 사단이 도합 20억에 판매한 청자 2점이 2억에 불과하다고 감정하여 파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와 증도가자의 시련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경향신문 2010년 7월 19일자를 살펴보면, “감정파동이 일어난 다음해인 지난 3월16일에는 김 회장을 비방하는 내용의 등기우편물이 김 회장의 주요 거래처인 서울의 한 사설박물관에 배달됐다. 우편물에는 A4용지 3장에 걸쳐 김 회장이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면서, 독단으로 협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우편물 발송지 우체국의 폐쇄회로(CC)TV 화면을 분석해 발송자가 강진 청자 매입 당시 감정위원인 ㅊ씨임을 밝혀냈다. 경찰은 현재 ㅊ씨를 명예훼손과 무고 등의 혐의로 조사하고 있다. ㅊ씨는 경찰에서 고미술협회가 감정한 가격이 자신들의 감정가보다 턱없이 낮은 데 대해 앙심을 품고 투서했다고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기사화 되어 있다. 

 

▲ 김종춘 다보성갤러리 회장   ©문화저널21 DB / 자료사진

 

기사내용과 같이 감정에 앙심을 품고 거래처를 자르기 위해 O미술관장까지 지낸 J모 사단의 핵심인사가 투서했으며, 약 10여명의 핵심관련자들은 그때부터 8년 이상에 걸쳐 검찰, 경찰에 수없이 투서하여 수사 받도록 하였음은 문화재업계에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2016년의 녹취록에는 그들이 ‘증도가자를 조지자’고 결의한 일시 및 내용까지 녹취되어 있다. 이것이 진품 유력함에도 소장자를 핑계로 역사에 언덕에 묻으려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로 보인다.

 

본 건은 문화국위와 직결된 세계 최고활자의 생사를 다투는 정말 중대한 사안이다. 우선 증거법칙에 따른 절대적 증명력은 인정된 상태이다. 세계최초의 활자와 이로부터 500년도 더 지난 정교한 활자의 유사도가 같아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과수 감정방법은 인장·서명위조 등을 밝혀내는 공법이다. 더욱이 대형파동까지 일으켰다. 활자표면상으로 주물사주조법의 특징들이 발견된다. 주자본과 번각본은 8%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며, 수백 종 증거들도 확보되어 있다. (계속) 

 

문화저널21 최병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