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일보, 24.04.08) 역사와 예술의 조화: 다보성 갤러리서 中오대십국 시대 석각 서화첩 최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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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4-04-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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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예술의 조화: 다보성 갤러리서 中오대십국 시대 석각 서화첩 최초 공개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국은 풍부한 역사 유적과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만도 57개에 이르며, 이는 전세계에서 이탈리아 다음으로 2번째로 많은 숫자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의 이면에는 심각한 문화재 해외 유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중국 문물학회가 밝힌 통계에 따르면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시작된 갖가지 전쟁과 불공정한 교역으로 인해 서예, 회화, 청동기, 도자기, 조각, 갑골, 서적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문화유산이 미국, 유럽, 일본 등 해외로 유출된 사례가 1000만 건을 넘어섰다.
한국 내에서도 이러한 중국 문화재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이 현상의 기원은 일본군이 중국과 한국을 점령했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은 본토에서 자주 발생하는 지진을 피하기 위해 중국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한국의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후 한국의 광복과 동시에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이 문화재들은 경복궁에 버려지고 말았다.
다보성갤러리에 보존된 석각 서화첩의 모습[사진-다보성갤러리]
그 후 해당 문화재들은 경복궁에서 한 지방에 위치한 소규모 공장으로 다시 이전됐다가 김종춘 다보성 갤러리 회장이 골동품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방대한 중국 문화재를 보유하게 됐다. 김 회장의 이러한 노력으로 수천 년을 거쳐 온 중국의 고대 유물들이 현재까지 다보성 갤러리에 잘 보존되고 있다. 1983년 설립된 다보성갤러리는 지난 40여 년간 우리 사회의 문화발전에 기여하며 한•중•일 고미술품 수만 점을 소장해온 고미술품 전문 갤러리다.
최근 다보성 갤러리에서 중국 오대십국 시대 후촉을 대표하는 화가 석각(石恪)의 서화첩이 발견됐다. 김종춘 회장은 처음 해당 작품을 발견했을 때 일본 고미술품으로 오인해 공개를 주저했으나, 전문가 감정 결과 중국의 유명한 화가 작품임을 확인하고 이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석각 서화첩 전체길이 [사진=다보성갤러리]
석각은 중국 쓰촨성(四川省) 출신의 오대십국시대 후촉에서 활약한 뛰어난 화가로 기록돼 있다. 유학(儒學)을 배웠으나 원래부터 사람을 풍자하고 야유하는 성격이 강했던 그는 화화(火畫)의 대가 장남본(張南本)에게서 그림을 배워 자신만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화풍을 창조해냈다. 특히 촉의 사관(寺觀) 벽화에 불교와 도교의 도상을 주로 그리며 종교적, 철학적 주제를 담은 작품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건덕 3년(965) 촉의 멸망과 함께 송의 수도를 변경(개봉)으로 옮겨 송태종(중국의 오대 십국 후주의 무관이자, 송 황조의 제2대 황제)의 명에 따라 상국사의 벽화를 제작했다. 이후 궁정으로부터 화원의 직을 수여받았으나, 이를 사퇴하고 귀향하던 중 생을 마감하게 됐다. 희필(戱筆)로 그린 인물화에서 섬세하게 표현된 얼굴과 손발, 그리고 거친 붓질로 표현된 의관은 그의 작품이 지닌 독창성과 예술적 깊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이러한 화풍은 모본(模本)의 ‘이조조심도(二祖調心圖)’에 잘 나타나 있다. 해당 작품의 폭은 각35.3×64.4로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며 현재까지 보유하고 있는 석각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이번 다보성에서 첫 공개된 석각의 서화첩은 가로 826.3cm, 세로 47cm로 8미터가 넘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섬세한 묘사가 조화로운 것이 특징이다.
작품에는 감탄을 자아내는 다양한 그림들이 담겨 있으며, 각 프레임에는 석각이 직접 작성한 그림에 대한 설명이 있어 작품의 이해도를 높이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각 분야 명인들의 인감이 찍혀 있다. 이는 해당 서화첩이 지닌 진정성과 예술적 가치를 증명하는 한편 명인들이 직접 작품을 감상했다는 사실을 공표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밖에 작품 양측에는 또 고대명인들이 석각의 그림을 감상한후 친필로 쓴 글자가 있는데 그중 그림을 펼치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철수(鐵遂)가 작성한 ‘묘묵전신(妙墨傳神)’이란 네 글자다. 이는 ‘정신을 담은 묘한 글씨’를 의미한다.
철수(鐵遂)가 작성한 ‘묘묵전신(妙墨傳神)’[사진-다보성갤러리]
‘철수'는 바로 양연소(楊延昭)를 지칭하는데, 양연소의 본명은 연랑(延朗)이다. 그는 중국 북송의 명장 양업의 아들로, 양육랑이라고도 불렸다. 999년, 요나라가 공격해 올 때 양연소는 수성(遂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성벽에 물을 뿌려 얼음 절벽을 만들어, 요나라 군사들이 성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 전략을 펼쳐 적은 병력으로 요나라의 대군을 물리치면서, 사람들은 그를 수성을 견고히 지킨 장수라 하여 ‘철수'라 칭했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명나라 내각 수보(首輔)인 이동양(李東陽)도 석각의 작품을 감상한 후 “정덕무진춘왕정월(正德戊辰春王正月)”이라고 기록, 1508년 봄 그림을 감상한 사실을 남겼다. 후난성(湖南省) 차릉(茶陵) 출신인 이동양은 문인이자 정치가로, 헌종, 효종, 무종 3대에 걸쳐 50년 동안 활약했으며, 호부상서와 근신전대학사 등 중요 직책을 40년 간 역임했다. 그의 저서 ‘회록당집(悔麓堂集)’ 100권과 역대 사실(史實)을 노래한 ‘의고악부(擬古樂府)’ 100편은 특히 유명하다.
이밖에 명나라 후기의 저명한 문학가, 시인, 그리고 서예가인 왕치등은 석각의 서화 작품을 감상한 뒤 깊은 인상을 받아, 특별한 찬사를 담은 글을 남겼다. 왕치등은 “일필주파본출어오도자초연불가급야차/권위석각자립일가우일본별개생면의/만력을해추월태원왕치등제(逸筆丶派本出於吳道子超然不可及也此/卷爲石恪自立一家又逸本別開生面矣/萬曆乙亥秋月太原王穉登題)”라고 작성했는데, 이는 “뛰어난 붓놀림은 오도자(중국 당대의 화가) 에게서 유래했지만, 그 초월함은 따라갈 수 없다. 이 책은 석각이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며, 또 다른 차원의 예술적 표현을 개시했다. 만력년 1575년의 가을, 태원(당시 산시성 성도)의 왕치등이 이에 찬사를 보낸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왕치등의 이러한 평가는 석각의 작품이 단순히 기술적으로 뛰어난 것을 넘어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예술적 가치를 지니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장쑤성(江苏省) 쑤저우(苏州) 출신인 왕치등은 자(字)가 佰穀(백곡) 또는 百穀(백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서와 예서에 뛰어난 솜씨를 지녔으며, 특히 예서는 전통적인 서예보다 필력이 더욱 힘차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중국 명대의 화가, 서예가 겸 시인으로 유명한 문징명(文徵明)의 후계자로서 주천구(周天球)와 같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활약한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명나라 초기 서예가 송극(宋克)은 후대 사람들에게 석각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그의 사조와 인품을 묘사한 글을 남겼다. 그 글에는 “석각은 자연스러운 인성을 지닌 자로, 익살스럽게 부처를 그린 그림을 통해 유머를 표현했다. 그는 처음에는 도교의 그림을 그렸지만, 나중에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또한 촉나라 평국의 임금에게 화원의 직무를 맡았으나 성품상 직무를 맡지 않았으며, 자신의 그림 재주를 과시하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어, 송극이 석각의 성품과 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명나라 초기 서예가 송극(宋克)이 작성한 글[사진=다보성갤러리]
송극의 호는 南宮生(남궁생)으로 장쑤성 출신이며, 원나라 말 동란기에는 각지를 떠돌며 뜻을 세웠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는 홍무년간(1369~1398) 초 잠시 동상부동지에 벼슬을 했지만, 곧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자유로운 생활을 향유했다. 송극은 초서 및 예서가 특히 뛰어나며, 그의 초서는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풍을 배우고 색정의 법을 겸했다. 또한 ‘급취장(急就章•빠른 한자 습득을 위한 책)’을 연구해 장초를 잘 쓰고, 축윤명(祝允明)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의 서적으로는 ‘남궁생진(南宮生傳)’이 있으며, 시(詩)가 훌륭해 고개(高啓) 등과 함께 ‘오중 10재사’라 불리우고, 서예에서는 송광(宋廣), 송수(宋璓)와 함께 ‘삼송(三宋)’ 이라고 불리웠다. 또한 송극은 묵죽을 득의로 하여 왕불(王绂), 양유한(楊維翰), 하창(夏昶) 등과 함께 찬사를 받았다. 그의 대표적인 서작품으로는 ‘왕연시권’이 있으며 이는 현재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
다보성갤러리에서 발견된 석각 작품에 대한 한자풀이를 맡은 사단법인 한국문자교육회 이사장인 박재성 한문교육학 박사는 작품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본 화첩은 석각의 예술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송나라 초기의 화풍을 알 수 있는 대단한 사료적 가치는 지닌 중국의 국보급 고대유물"이라고 강조하며 해당 작품이 지니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다보성 갤러리 김종춘 회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화의 발원지”로 칭하며 석각 서화첩이 규모, 내용 및 문화적 가치 면에서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이조조심도(二祖調心圖)’보다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김 회장은 또한 이 석각 서화 작품이 오는 4월 미국 하버드대 예술박물관에서 전시될 예정임을 밝히고, 이와 함께 다보성이 소장하고 있는 문징명의 서화 작품과 원나라 시대의 도자기 세 점도 전시될 것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김 회장은 “이런 귀중한 유물을 발견할 수 있어 매우 영광스럽다”며 “소중한 유물을 혼자서 감상하기보다는 전 세계인들이 함께 감상하고 즐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문화와 예술이 서로 교류하고 융합하는 현 시대에, 세계와 이 희귀한 보물을 공유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해당 서화첩이 중국의 고대 유물인 만큼 중국의 전문가들이 직접 갤러리를 방문해 해당 작품을 감정 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석각의 서화첩은 다보성 갤러리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으며, 이 외에도 전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고대 진귀한 유물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석각 서화첩의 그림 일부[사진-다보성갤러리]
이향미 기자(anaislee@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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