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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022.07.08) 20대때 고미술업 입문… 엿장수 리어카서 우연히 김홍도 ‘호렵도’ 발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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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22-07-0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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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춘 다보성갤러리 회장은 20대 초반에 고미술업을 시작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가난을 벗어나려 애쓰던 1970년대인데, 그때 이야기를 하면 소설책 몇 권이 나온다”며 웃었다.

해방 직후인 1948년에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그는 18세 때 170원을 갖고 서울에 올라왔다. 완행 열차비 120원을 내니 50원이 남았다고 한다. “서울에 전차가 다니는 게 참 신기하더군요. 청량리 가구점에 취직해서 일했는데, 당시 그 일대가 논밭이었습니다. 공장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면 머리맡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던 게 지금도 떠오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게 등을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손으로 만드는 건 자신 있었습니다. 책상, 서랍 등 만드는 족족 팔려나갔지요. 첫 달에 1000원이었던 월급이 매달 1000원씩 올랐습니다.”

다른 가구점에 스카우트돼 갔는데, 법원 압류 물건을 취급하는 가게로 옮겨갔다가 아예 자신이 점포를 차렸다. 22세 때였다. 고미술품에 눈을 뜬 게 그 무렵이었다. 약국을 하던 한 여성으로부터 서울 압구정동 뽕나무밭의 물건을 매입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서였다. 고미술업에 한창 재미를 붙이던 그는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가게가 망하는 일을 겪었다.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노동자로 가서 1년을 일했어요. 10년 작정한 일이었는데, 일시 귀국했다가 우연히 한 엿장수가 리어카를 끌고 가는 모습을 버스 안에서 봤어요. 거기에 김홍도의 병풍 ‘호렵도’ 등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재빨리 가서 사들인 후 고미술업자에게 넘겼더니 그가 재일교포 사업가에게 비싸게 팔았다더군요. 그 엿장수의 리어카를 본 덕분에 50년 동안 이 일을 한 것이지요. 하하.”

그는 지난 세월 동안 고미술 수집과 매매가 상업이자 문화를 가꾸는 일임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고 자부했다. “언젠가 자서전을 써서 제가 겪은 수많은 일을 기록할 겁니다. 그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장재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