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대한경제, 2021.11.10) 문화계 마피아 때문에 세계적 유산 ‘증도가자’가 썩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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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1-11-10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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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서양화된 현실에서 한국인들에게 서양 문물보다 한국의 것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습니다. 우리만의 나침반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김종춘 다보성갤러리 회장은 당시 30대 초반이었다. 그 같은 의무감에 서울 강남구 서초동에 고미술전문 화랑 ‘다보성’을 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삼국시대 토기를 비롯해 도자기, 불화, 고서화 등 전통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해외로 유출되는 문화유산을 안타까이 여겨 서화나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을 발굴해서 이 땅에 남기는 일에 전 재산과 젊음을 바쳤다.
1992년에는 화랑을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으로 옮겨 전통문화재 수집과 대중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동안 모은 유물만도 2000~3000점에 달한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보다 138년이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금속활자도 100여점 소장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다보성이 ‘고미술 보물창고’라는 말도 인사동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남다른 안목과 예지력, 두둑한 배짱을 바탕으로 고미술 사업을 벌여온 김 회장이 올해로 화랑 개업 40년을 맞아 또 한번 큰일을 해냈다. 지난달 27일부터 한국과 중국 국보급 문화유산을 모은 기획전 ‘한-중문화유산 재발견’전을 시작했다.
1층 한국관에는 선사시대 토기부터 삼국시대 금제목걸이, 고려시대 때 제작된 ‘청자역상감동자문유개소주자’, 조선시대 ‘백자청화호치문호’와 ‘화각필통’, 내고 박생광의 ‘장생도 6폭 일지병풍’ 등 다양한 문화유산 300여점을 골라 배치했다. 또 2층에는 선사시대 흑도잔을 비롯해 당나라 채회도용, 송나라 정요백자, 원나라·명나라 청화백자, 청나라 채색자기, 민국시대 주산팔우 도화 등 200여점을 처음 공개했다.
한국의 백자 달항아리(白瓷大壺), 52×20×20.5㎝, 18세기, 조선. 국보급으로 손색이 없다 |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백자청화호치문호(41×15×16㎝, 18세기). 호랑이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눈길을 끄는 청화백자 항아리다 |
청자 기법으로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불상. 희귀성 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
중국 한나라 때의 녹유도선(43.5×51.0㎝, BC206∼AD220). 도기의 표면에 납유를 바른 뒤 불에 구워낸 배 모양의 조형물이다 |
중국 문화재가 대거 공개된 것이 이채롭다.
“내년에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 30주년을 맞기 때문에 문화교류도 더욱 활기를 띨 것입니다. 양국의 지난 30년간 긴밀한 관계를 문화재 전시 같은 민관 외교를 통해 더욱 발전시키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중국의 좋은 것을 연구해서 한국 문화의 일부분으로 흡수해야죠.”
김 회장은 1997년부터 한국고미협회장을 일곱 번째 연임한 고미술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다. 2003년에는 헌법재판소에 ‘도난문화재를 무조건 보유자로부터 몰수하도록 한 문화재보호법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내 ‘보유 경위를 안 따지고 몰수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재 결정을 얻어냈다. 김 회장은 특히 시장의 신뢰성을 약화시키는 ‘짝퉁’을 몰아내기 위해 고미협 회장 임기 내내 ‘가짜와의 전쟁’을 벌여 화제를 모았다.
2011년 11월에는 세계 최고 금속활자로 추정되는 ‘증도가자(證道歌字)’를 공개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엄승용 전 문화재청 정책국장이 제게 두 번이나 찾아와 ‘증도가자’를 국가지정 문화재로 추진하겠다고 제안해 왔죠. 그러나 일부 ‘문피아(문화재+마피아)’ 세력이 제동을 건 것 같아요. 문피아의 반대와 협박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빛을 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김 회장은 “증도가자 논란의 이면에는 전문가들 간의 경쟁의식, 소장자 간의 시각 차이와 파벌 다툼 등이 깔려 있다”며 “청주고인쇄박물관 역시 증도가자가 진짜로 판명되면 ‘직지의 고장’이라는 청주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비쳐 왔다”고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는 최근의 문화행정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쏟아냈다. “요즘 보면 ‘문화불모지 한국’이란 말이 예사롭지 않아요. 국립중앙박물관 예산이 30억~40억원 수준에 불과해요. 소장품 구입 관련 예산은 크게 깎이고, 관 주도 문화재 행정으로 예술의 자율성과 다양성은 더욱 위축될 게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는 고미술시장 활성화 방안도 힘주어 언급했다. “고미술품은 선조들의 ‘문화 DNA(유전자)’가 깃든 유산입니다. K팝이나 K아트 같은 문화의 씨앗을 키워내는 밑거름이고요. 중국은 명나라 도자기 ‘술잔’이 2억8100만홍콩달러(약 380억원)에 팔리는 등 시장이 뜨거운데 우리는 30년 가까이 불황에 빠져 있습니다.”
김 회장이 2006년 시장의 혁신적 변화를 위해 꺼내든 게 고미술 감정아카데미 강좌 개설이다. 협회차원에서 감정 전문가를 양성하고, 고미술품의 진위 구별이나 가치판단 능력을 길러주는 16주 과정이다.
“전직 장관, 금융사 임원, 교수, 변호사 등 각계각층에서 뜨겁게 호응하더군요. 그동안 감정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한 회원만 2000여명입니다. 앞으로 이들이 한국 고미술 시장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겁니다. 고미술 문화대학 설립도 준비 중이고요.”
고미술의 향연을 방불케 하는 다보성 갤리러 전시작품들. 인사동에서 다보성갤러리는 ‘보물창고’로 불린다. |
그는 “고미술 시장이 꾸준히 성장하려면 누구나 쉽게 소장품을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가 세운 기준은 세 가지. 어떤 형태이든 애호가에게 소장 가치를 줘야 하고, 시장의 투명성을 키워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전통문화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입니다. 문화에 투자하는 국민이 있는 한 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 돈이 된다고 해서 도자기나 고서화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산다는 의식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김경갑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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